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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뱃머리에 부는 훈풍
  Author : 황성혁     Date : 05-02-15 11:15     Hit : 13456    
 
 
2004년 12월 30일 대한조선학회지 제 41권 제4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뱃머리에 부는 薰風

한 희랍 선주로부터 e-mail을 받았다. “지난주 파나막스 벌커선 한 척을 팔았습니다. 지난 80년대 중반, 사랑하는 아버님과 미스터 황 사이에 체결된 계약에 따라, 87년에 인도된 바로 그 배입니다. 그때 계약가격이 1600만 불이었지요. 그 착한 배는 17년 동안 열심히 일한 뒤 원래 가격보다 훨씬 많은 1750만 불에 팔렸답니다. 그것은 몇 가지 뜻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조선소가 배를 튼튼하게 지었다는 것, 우리회사의 선원들이 배를 잘 관리 했다는 것, 그리고 저희 관리자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장사를 잘 했다는 것입니다. 저승에 계신 아버님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겠지요. 미스터 황에게도 보고를 하는 것이 의무인 것 같아 사연을 보냅니다.” 나는 희랍의 해신 포세이돈 같던 아버지와 효성스런 그 딸을 생각했다. 그럼 흐뭇이 웃으시겠지. 얼마나 자랑스러운 딸인데.
지난 유월 희랍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와의 대화는 언제나 따뜻했다. “작년에 일본 조선소와 계약한 파나막스 벌커를 금년 사월에 인도 받았어요.” “값은 얼마를 주었는데” “2250만 불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3년 동안 하루에 3만5천 불에 용선을 주었어요.” “엄청 나구먼. 손익 분기점은 하루 만 불쯤 되나요” 그녀는 누가 들을까 두렵다는 듯 주위를 둘러 보고는 말했다. “7천 불 남짓 할거예요”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하루에 2만8천 불씩 현금을 남기는 장사라는 것이다. 용선이 끝나는 삼 년 뒤면 그 배에 투자한 금액 전부보다 많은 자금을 회수하게 되는 것이다. 그 배의 수명을 20년으로 보면 나머지 17년 동안 공짜로 배를 운항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조그만 어깨 뒤에 산같이 앉아 미소 짓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장사는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해신이라 불리울만 했었다. 마흔 척이 넘는 낡은 배를 시황이 아주 좋을 때, 배를 마구 사들이던 이란에 팔아서 엄청난 현금을 확보한 뒤, 런던 사무소를 폐쇄하고 희랍으로 돌아 왔다. 배 한 척 없었지만 회사와 함께 하겠다는 직원과 선원 모두를 거두었다. 두 해가 지나지 않아 세계 해운 시장은 극심한 불황에 빠져 들었고 선가는 바닥으로 떨어 졌다. 그는 주저 하지 않고 벌커 열 척을 한국에 발주 했었다. 그의 직원들은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충성심으로 그를 도왔다. 그 배들이 인도 될 때쯤 해서 해운시장은 활기를 되 찾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장사는 그렇게 하는 거야.

포항제철과 한전이 철강 원료와 연료의 장기 수송 계약을 일본해운 회사와 맺었다. 모든 해운 회사가 탐을 낼 만큼 상당히 큰 계약이었다. 국내 해운업계가 발끈했고 노동조합도 팔을 걷고 나섰다. 국회의원들까지 핵심전략 물자에 대한 외국선사와의 장기수송계약은 국내해운업계는 물론 조선, 금융업계에 막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심지어는 계약의 취소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언뜻 타당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눈 여겨 보면 우리 해운 산업의 낙후성을 있는 대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한전이나 포철이 왜 친숙한 국내 해운회사를 접어 두고, 손 아픈 외국 선사와 운송 계약을 맺었겠는가. 우리 해운 업자들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절한 조건으로 내놓을 적당한 배가 없었던 것이다. 처절한 경쟁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각박한 시장에서,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정치권이나 화주 심지어 노조의 도움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해운회사를 누가 적절한 사업의 파트너로 고려할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모든 산업이 눈부신 발전을 해 왔지만, 가장 낙후된 부분이 해운이었다. 지난 80년대는 거론할 형편도 되지 않았다. 해운회사도 있었고 선박들도 있었지만 시장에서 생존할만한 힘이 없었다. 배는 낡았고 회사는 영세했다. 자존의 의욕이 없었고 남의 도움에 전적으로 기대던 실정이었다. 세계해운시장에서는 잘 알려진 봉이었다. 가장 비쌀 때 배를 샀고 가장 쌀 때 팔았다. 정부의 융통성 없는 외환 관리 규제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었었지만, 근본적으로 해운회사 자신의 체력에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해운에서 벌어들인 외화를 다른 곳에 돌려 쓰기 시작하면서 선사들의 경영은 파탄이 났다. 독립성은 은행에 헌납되었고, 자율성은 정부의 보호막이라는 규제와 바꾸었다. 몇몇 건실한 해운 전업 회사가 있어서 해운의 체면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생존을 포기해야 했었다. 그 뒤 한국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모든 산업들이 세계화 되어 갔지만 유독 해운만은 오늘에 이르기 까지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헤어 나지를 못한 실정이었다.

그 동안 희랍을 비롯한 해운 선진국들은 그들 자신의 계획과 결단에 따라 선복량을 늘려 갔다. 어려운 시절에도 정부에 손 벌리지 않았고 어느 경우에도 정부의 간섭을 배제했다. 극심한 불경기 때는 엄청난 손해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꺾이지 않고 과감하게 투자를 계속해서 어느 때 어떤 시장 상황이 오더라도 이겨 낼 수 있는 강한 체질을 갖추었다. 세계의 은행들은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줄을 서는 형편이 되었다. 그들은 시장에 적응하기보다 오히려 그들의 계획으로 시장을 이끌어 나갔고, 결국 해운을 거대한 이익을 남기는 산업으로 키워 냈다.

역사상 유례없는 훈풍이 세계 해운시장에 불고 있다. 세계 경제가 확장되고 중국을 비롯한 개발을 시작하는 거대한 나라들의 해상 물자 유통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하루 용선료 1-2만불 하던 화물선이 15만 불을 받고 있다. 배를 잡을 수 없어서 화물을 실어 나르지 못하는 상황이 왔다. 적절한 배가 적절한 때에 필요한 장소에 있으면 운임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작년 1600만 불에 샀던 87년 산 VLCC가 금년 4900만 불에 팔렸다. 금년 여름 1175만 불에 샀던 6만 톤 급 탱커가 삼 개월 뒤 2100만 불에 팔렸다. 6500만 불로 계약해서 금년 가을 인도된 VLCC는 그 자리에서 1억 3천만 불에 호가되었다. 역사상 유래 없는 호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호황도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준비된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를 계속한 선주들의 금고에 현금이 넘쳐나고 있는 동안, 투자의 능력이 없거나, 투자의 위험을 피하고 안이하게 남의 배를 빌려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견딜 수 없는 적자가 누적되었다.

뱃머리에 부는 훈풍은 움츠려 들었던 어깨를 펴게 하고, 얼어 붙었던 가슴을 녹이며, 그 분출되는 에너지로 만방을 소생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훈풍은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덧없는 한바탕의 봄 바람으로 그치는 것은 아닐까. 하늘 모르고 뛰어 오르는 운임은 이미 훈풍의 끝 자락을 들어 내는 징조는 아닐까. 끝없이 치솟는 선박 건조 가격은, 이제 새로 투자하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보여주는 지표는 아닌가. 아니다. 아니다. 조금 늦은 듯한 지금이 기회이다. 지금이야 말로 침체를 털어 버리고 우리 해운 산업의 백 년 대계를 세울 때인 것이다.

훈풍은 열린 뱃머리에만 분다. 뱃머리를 활짝 열자. 정부 규제와 노조와의 관계가 어렵다 한탄 할 것 없다. 모든 것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믿을 곳은 자신 뿐이다. 한국조선소가 일감이 많아 협조를 구 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말자. 눈을 뜨면 세계 곳곳에 적절한 조선소가 얼마든지 있다. 경쟁력 있는 조선소를 찾아 내어, 때 맞춰 선박의 발주를 계속해야 한다. 한국의 은행들로부터 돈을 빌리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지 말자. 세계 곳곳에 쌓여 있는 자본들이 좋은 투자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이 위험해서 섣불리 뛰어 들기가 불안하다고 좌절하지 말자. 세계 곳곳에 훌륭한 사업가들이 파트너를 찾고 있다. 손해를 나누고,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은 믿을 수 있는 파트너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국내에서도 좋고 해외에서도 좋다. 문제는 체력을 갖춰서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시장은 파도와 같다. 쉬임 없이 출렁거리며 때로는 그 높이와 힘으로 그 물결 위에 있는 생명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 기회가 있다. 그 파도를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파도를 효율적으로 타는 일, 시장의 변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체력을 확보 하는 것, 그리하여 이 훈풍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이 매력적인 산업의 백년대계를 세울 절호의 기회를 붙들어야 할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