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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고이지신
  Author : 황성혁     Date : 03-12-19 16:08     Hit : 18762    
 
 
溫 故 而 知 新
 

어느날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독일에서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기를 들자마자 그의 흥분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형님, 나 지금 울고 있습니다. 울고 있다고요".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형님, 나는 오늘처럼 울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월드컵에서 4강에 올랐을 때도 울었지요. 그러나 오늘 같지는 않았다고요. 그 오랜 세월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돈도 벌고 고생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많이 했다고요. 그러면서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 본적이 없었다고요.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사니까, 이렇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날도 오는구나 하고 지금 우는 거예요".

나는 무슨 말인지 제대로 주워 담지도 못하고, 졸음 속에서, 쏟아지는 그의 말의 홍수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형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나라만큼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 나라가 몇이나 있느냐고요. 일본이요, 전부 가짜예요. 미국이요, 미국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어요".

나는 그제서야 그 날이 대통령 선거 다음날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선거 결과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보다 외국에서들 더 떠들썩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주워 섬겼지만 나는 건성으로 듣고 있었고, 그가 전화를 끊고 나서야 문득 그의 말과, 그가 말한 민주주의라는 것과, 우리의 주변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학벌과 지방색이 지배하는, 보스를 따라 철새처럼 몰려다니는 정치 판에서, 상업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사람이, 변변한 정치파벌 하나 없이, 달걀로 바위를 친다는 극단적 비아냥을 들어가며, 가시밭길을 한 단계씩 올라,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물결칠 때마다 이합 집산하는 야합정치에 분명한 반대 기치를 들었고, 지방색을 깨겠다고 실패할 것이 뻔한 선거에 나가 연거푸 실패함으로서 그 실패가 성공임을 보여 주었던, 예비선거를 용기 있게 예비선거답게 치르며 약세가 오히려 강세임을 가르쳐 주었던, 그리고 끝내 그의 꿈을 이루어 내고만,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것은 자신의 굽히지 않는 용기와 끈기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변화를 원하는 국민의 의지와 민족의 자각이 꽃 피운 조국의 자랑스런 현주소이기도 했다. 멍하니 앉아 마주하고 있던 캄캄한 유리창에 갑자기 처칠 수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런던의 팔리아먼트 스퀘어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국회의사당을 응시하고 서있는 그의 검은 동상은 언제나 위압적이었지만, 그날 유리창에 비친 그의 눈빛은 좀 겸연쩍어 보였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던 그의 말 때문이었을까.

거의 모든 TV는 대통령 취임식장을 비추고 있었다. 오년에 한 번씩 있는 그 식장은 언제나 장엄하고 희망에 가득차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약속은 그날 봇물처럼 쏟아 졌고 만백성은 앞으로 다가올 새 세상을 온통 밝은 희망으로 채색했다. 세상에 중요한 사람은 모두 그날 단상에 모였다. 모든 것은 의례히 의젓하고 예스럽고 자랑스러웠다. 그 식장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빌었다. 삶이 풍요로워지라고,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지라고, 한반도 남북의 모든 동포들이 한결같이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그러나 모든 익숙한 풍경 속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대통령 휘장이었다. 당연히 황금색 봉황무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색동으로 휘감은 문양이 덩그렇게 그러나 좀 어색하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 저것이 새정부의 상징이라는 것이구나" 했다가,

"봉황무늬가 권위주의의 상징이어서 바꾼다더니 저것으로 바꾸었구나" 그러고는,

"그럼 이분들은 봉황무늬까지도 권위주의의 상징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오랫동안 써 오던 것을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마음대로 바꾸어도 괜찮은 것인가" 라고 혼자 질문을 계속하였다.

황금색 봉황문장은 오랫동안 하늘이 내린 권위의 상징으로 인정되어 왔고, 고귀함과 평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왔고, 대통령자리처럼 고귀한 곳에는 의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나는 생각해 왔었다. 문득 앞으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그들만의 문장으로 바꾸어 쓴다면 그 고귀한 잔치는 혹시 그들 몇 사람만의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모든 백성들이 받아 들여왔던 것,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이 받아 들였던 것은 그 나름대로 거기 있어야 할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걱정은 계속되었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버려야 하는가, 그래야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새 정부는 개혁에 관한 한 우리 모두의 꿈이다. 새 정부는 나라의 개혁과 사회의 개조를 위해 큰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 우리나라 건국초기 마이동풍의 독재에서부터, 정통성이 적은 군사정권의 눈치보기 통치를 거쳐, 노쇠한 정치인들이 이끌어온 최근의 무기력한 정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사회 구석구석에서 개혁의 필요함을 절감하면서도, 그들 나름대로 생태적인 제약 때문에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결국 개혁이라는 큰 화두를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물려주었고, 그것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당연히 해야할 일로 새 정부에 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새로운 문장을 보고 나서 개혁을 이루려는 새 정부의 자세에 대한 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옛것을 다 바꾸는 것 보다 지켜야 할 것과 고쳐야 할 것을 가려내는 작업이 개혁의 첫걸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적이 아니고 대화의 상대이며, 제재의 상대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귀에 쏙 들어온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이 시원해지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쪽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동포들을 굶주림의 지옥 문턱으로 내 몰면서, 핵 폭탄을 개발하겠다고 설치는가 하면, 미사일을 쏘아대고 국제 협약을 어기는 일을 밥먹듯 하는 북한의 행태는 매로 다스려야 할 망나니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미국의 오만 방자한 짓거리가 우리의 비위를 거스른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한 미국에 대해 동등한 입장의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는 것은 또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러나 대한민국은 상당한 부분에서 미국에 기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미군의 철수기미가 있는 날 한국에 와 있는 외국자본은 일거에 썰물처럼 빠져 나갈 것이다. 미국자본의 일부분이 한국 증시에서 철수하겠다는 몸짓만 보여도 우리의 금융시장은 붕괴할 것이고, 미국이 우리의 중요 수출품에 대해 수입제한 눈짓만 보여도 우리의 생산기반이 무너지게 되어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재벌의 폐습은 누적되어 왔다. 재벌들의 부의 세습과 국력의 편중 현상은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 또한 얼마나 정당한 것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우리 경제의 기둥이며 그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을 때 우리의 삶의 기반이 허물어 질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 져야 한다는 말에 우리 모두는 공감한다. 그때 이 지상은 낙원이 되리라는 것도 우리 모두는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이 균형을 잃고 졸속히 이루어 질 때, 분배 해야할 부 그 자체가 슬어질 수도 있다는, 이미 그런 예를 여러 나라에서 보아 왔음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은 짧은 기간에 한 정권 아래서 몇 사람의 두뇌로 이루어 질 수가 없다. 오히려 여러 정권을 거치며 넓게 깊게 두뇌를 모아 이루어 져야 그 진실한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권 관계자들만의 잔치가 아니고 국민전체가 참여하는 물결이 되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심각한 국론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고, 그것은 국력의 엄청난 소모를 가져올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가 짧은 기간동안에 개혁에 염증을 낼 수도 있다. 더구나 새 정권은 선거에서 2퍼센트 남짓한 우세로 선출되었으며 거의 과반수가 넘는 국민들은 지금도 새 정부의 정책에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溫故而知新을 생각한다. 새로움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잊기 쉬운 자세이나, 그것이야말로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줄 지혜라 생각한다. 과거와 전통에 대한 명확한 이해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존중이 밑바탕이 되었을 때, 개혁해야 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명확히 가려질 것이고, 개혁은 그 뿌리를 건실하게 내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것 다 챙기고 언제 개혁하느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개혁을 지연시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개혁을 성취하는 길이라 확신한다. 새 정부가 추구하는 개혁이 대통령 휘장을 바꾸듯이, 모든 옛것을 수구적 권위로 몰아 부치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그 옛날부터 있던 것들의 의미와 가치까지 함께 아우르는 것일 때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부가 임기를 마치고 물러 날 때, 나는 내 독일에 사는 친구로부터 다시 한 번 전화 받기를 소망한다. 이 정부가 시작될 때 그가 얻은 자부심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이 정부가 이룩한 개혁이 그의 긍지가 되고, 그의 먼 타향에서의 삶이 순항이거나 난항이거나 간에, 조국의 모습이 언제나 그 삶의 밝은 등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Best Regar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