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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리 찾기
  Author : 황성혁     Date : 06-11-02 14:49     Hit : 21241    
 
 
2006년 9월 30일 대한조선학회지 제43권 제3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자리 찾기

 

노동운동의 강경한 투사로 알려졌던 한 노동위원장이 투자 홍보대사로 변신을 하였다. 뉴욕까지 가서 외국인을 상대로 한 투자설명회에서 열정적으로 투자유치를 하였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을 투자 대상으로 비교할 때 모든 게 한국이 유리하지만 노사문제가 걸림돌임을 알고 있다면서 노사 문제는 자기가 나서서 중재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또 한 강경일변도의 지도적 기업 노조에서 새로 선출된 위원장이 스스로의 변화를 약속하며, 거래처를 직접 찾아가서 고객들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하고 앞으로 안정적 노사관계를 확립해서 고객들의 신뢰를 얻어 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노조가 스스로 노사관계가 투자나 고객유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어 노사관계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조짐이라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고객들이나 투자가들의 앞에 나선다는데는 일말의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들이 나서야 하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그 자리는 그들이 나설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은 밖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노조를 다독거려 진정한 노사안정을 이루는 것이며, 바깥일은 그 일을 잘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두는 것이 올바른 자리잡기 같아서이다.

노조위원장이 뉴욕의 투자자들 앞에서 별 설득력 없는 큰소리를 치고 있는 동안 국내 노조들은 번개같이 산별노조로 변신하기 시작했고, 한 건설노조는 그들과 직접 관계가 없는 세계적 제철회사 본사를 점거해서 그 사무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대표적 자동차 회사의 시설확장 계획은 노조원들의 주차장 이동 거부로 무산되었다. 투자자들이나 고객의 눈에 노조 지도자들의 나섬은 설 자리를 잘못 잡은 헛 다리 집기로 비쳐질 수도 있다.

노동 조합 간부들이 노동절 행사를 위해 정부 돈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혁명열사 능에 헌화하고 참배했다고 한다. 왜 우리 노동자가 우리의 세금으로 북한 노동절에 참가해야 하고, 우리 노동자와 북한 노동자 사이에는 어떤 동질성이 있으며, 그들의 혁명열사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꼭 물어 보고 싶다. 그들은 참배 후, “혁명 열사 능에  간 것이 뭐가 문제냐”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거기가 어느 자리라고 그들이 나선단 말인가. 그들을 저런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이 사회가 추해 보인다. 최소한 그들이 쓰고 온 내가 낸 세금만이라도 돌려 받고 싶다.

전국 공무원 노동조합은 을지연습을 두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전쟁연습”이라 규정하고 폐지 촉구 성명을 냈다고 한다. “연습 기간 중 과로해서 공무원 노동자들이 정상적인 업무를 할 수 없다” 고 했다고도 한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 왜 그들이 앉아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고시제도 폐지, 노조간부를 국가 청년위원으로 위촉, 발전기금 100억 적립, 국회교섭권, 낙하산 인사조치 금지, 노인고용 할당제, KBS 수신료 폐지, 국정감사폐지, 그리고 드디어 중국간도의 반환까지 요구하고 나섰다고 한다. 스스로의 자리를 청와대나 국회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남의 자리나 기웃거리다 무위도식 할 사람들이다.

전교조는 성과급, 교원평가제를 없애서 모든 교원을 평준화 해 달라고 한다. 나라의 백년 대계인 대학입시제도 마저 그들의 편협된 소수의견에 따라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10월 한달 수업은 보이콧 하겠다고 한다. 교원의 노조라는 것이 교원전체의 복지를 위해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외치는 것 같다. 은행 노조가 생기더니 교수 노조까지 생겼다. 노동자 같지 않은 사람들이 노동자 라고 우기다 보니 앉을 자리를 잃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파행까지 저지르며 우왕좌왕 하는 것이 아닌지. 사회적 책임있는 사람들이 결성한 노조라면 좀더 높은 이상과 봉사정신을 보여 줘야 할 것은 아닌지. 이제 군인노조도 허용하고 사용자노조도 장관노조도 소방관 노조도 다 허용해서, 나라가 외국의 침략을 당해도, 그들의 집이 불타도, 그들의 집이 불법적 난동으로 폐허가 되어도, 그들의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어도, 그들의 회사가 거덜이 나도, 오직 목청하나 남보다 더 크게 낼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인 것 같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골라내어 우리 세금이 유입되는 통로를 막아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없애는 길을 찾아야겠다.

대우건설의 매각을 위해 우선협상대상자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밀실사 팀의 실사를 위한 사옥진입이 노조에 의해 저지되었다. 매매가격 공개, 선정요건 공개, 인수자료 조달경위등을 공개하라는 것이다. 그런 사항들은 공개치 않도록 약속된 사항들이며 밝혀서도 안되는 것이며 그들이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없는 사항이다. Lone Star가 외환은행을 매각하려는 움직임에 외환은행 노조가 원천무효를 주장하며 제동을 걸었다. 전문가 들과 관련 기관이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동원하여 진행할 사항이지 노조가 아마추어적 지식으로 나설 일은 아니다. 발전노조가 발전소의 불을 끄겠다고 위협한다. 발전회사 통합, 해고자 원직복귀, 구조조정 프로그램 철폐,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한다. 노조는 그의 자리를 경영진, 정부, 법의 집행자 자리로 옮겨 놓고 있다.

파업이 연례행사가 된 현대자동차의 노사관계는 노와 사가 서로 자리찾기에 실패한 우리 노동운동의 말기적 증세의 대표적 사례로 보인다. 그들의 노사 분규는 작업조건의 열악이나 낮은 임금에 저항하는 노조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의 평균임금이 세계 최고 수준인 6 만불선이고 정년이 자그마치 58세이며, 파업을 할 때마다 무골 경영인들은 이들에게 끌려 다녀 세계에 유례없는 양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 회사의 번영이 결코 지속될 수 없는, 잠깐 지평선에 나타난 신기루 같은 사상누각이라고 단언한 외국 친구의 말이 실감난다. 생산라인의 개선을 위해 인력배치를 바꾸려고 하면 정당화 될 수 없는 이유로 거부되고, 생산성을 위한 인력조정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해외 공장건설은 일감이 줄어든다고 반대되고, 국내생산 라인을 확장하려 하면 주차장이 옮겨져 불편해 진다고 결사 반대다. 투자를 늘리고 시장을 확대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모두 “우리들”이 뼈 빠지게 일하는 동안 돈만 챙기는 아주 고약한 “너희들” 의 일이다. 경쟁력은 떨어지고, 품질에 있어서의 빛나는 전통은 녹슬어, 회사는 이류로 전락하고 있지만 그것마저 “너희들”의 일이다. 외국 자동차 회사들이 고비용-저효율로 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선례조차 “너희들”의 일이다. 그들의 회장이 구속되고 일상적인 일에 헤아릴 수 없는 장애가 있어도 기본적인 예의를 보일 소양이 없다. 58세 정년을 쟁취하여 환호 작약 하였으나, 그들의 자제들의 취업의 길은 점점 막혀가고, 그들이 6만불 넘는 연봉조차 부족하다고 아우성치는 동안,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직원들의 생활은 처참하게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눈을 돌릴 염치도 없다. 노조 지도자들의 관심은 회사의 번영이나 노조원들의 복지 보다, 오직 파업을 계속하기 위한 경영층과 노조원 사이에 증오의 틈을 창조하는 작업에 고착 되어 가고 있다. “우리들”의 일은 자멸의 수렁으로 돌진하는 것 뿐이다. 그런가 하면 원가를 계산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는 환율, 자고 나면 치솟는 자재비, 끝없이 갈아 앉는 내수침체 같은 악조건 속에서, 뻔히 보이는 참담한 내일에 애써 외면하며, 도무지 정당화 될 수 없는 생때에 끌려 다니는 회사경영층의 자세는 단지 실망스럽다. 한동안 공장 문을 닫더라도 하지 않아야 할 것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경영자들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무력하게 끌려만 다니는 경영진의 안이함이 노동자들의 생떼를 부추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드디어 강성노조들이 산별노조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왜 산별노조냐는 질문에 “노동운동이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이 나왔다. 임금이 충분히 올랐고 노동환경도 좋아졌고 그런 가운데 노조 조직율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더 이상 노동운동을 계속 해 나가기가 힘들다는 말로 들렸다. 산별노조 가입을 압도적 지지로 가결한 부유한 노조도 생기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다. 노조원들이 산별 노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 하고 결정을 내렸을까. 산별 노조 아래서, 자기들 보다 여건이 열악한 같은 직종의 노동자들과 한배를 타야 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그들과 나누어야 하며, 각 사별노조는 해체되고 노조회비는 상위노조인 본부로 보내져야 한다는 것, 비정규직 문제 논의에서는 정규직 근로자들의 희생이 필수적이라는 것, 사무실은 공장 밖으로 나가야 하며 산별노조 관계자는 사업장 접근이 제한되고, 산업장 노조위원들은 산업장에서가 아니라 산별노조에서 직접 선출한다는 것, 상위노조에 교섭권, 단체협약권을 주고는 결국 상위노조의 목적을 위해 그들의 기득권이 크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점이, 포괄적으로 이해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지 노사 갈등을 계속하는 수단으로, 노조원들의 합의를 얻어 내었다면, 노조원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속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걱정스럽다. 단일 직장 안에서도 그저 투쟁거리만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직종이 다르고 기업문화가 다르고 노동조건이 다른 사람들이 각기 이해 관계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투쟁을 위한 투쟁을 반복한다면 70년대 영국의 파업 천국이 재현될 수도 있을 것이고, 이 나라의 산업은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지난 8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자 뿐 아니라 이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개혁에 큰 역할을 해 왔던 노동운동은, 자기들의 설 자리를 잃은 지도자들이 그들의 목표 잃은 자리를 지키기 위해, 쟁의를 위한 쟁의를 계속해 결국 노조를 자멸시키는 결과를 가져 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울 뿐이다.

명명식은 선주와 조선소가 벌이는 조선소 최대의 축제이다. 천문학적 돈을 들여 배를 지어 물에 띄우고 그것이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의식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가장 감동적이고 의미있는 의식이다. 그 중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 그 배에 생명을 부여하고 이름을 붙이는 대모이다. 전통적으로 선주 집안 여인들이나, 금융을 주선한 사람들, 화물을 주어 그 배가 생명이 다 할 때 까지 장사를 계속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 정책 입안자들이나 정부 기관 관계자의 부인들이 대모가 되어왔다. 그들은 그 배의 생병이 다 할 때까지 그 배와 선원들의 수호자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특이한 전통이 만들어 지고 있다. 여자용접사가 명명을 하고 노조위원장 부인이 대모노릇을 한다. 일견 가슴 흐믓한 정경이기도 하나, 이것이 한국적 노사문화의 일그러진 한쪽 얼굴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는 전통적으로 용접사나 노조 위원장 부인이 설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명식에 참석하는 선주는 노조에 격려금을 지불하게 되어 있다. 때로는 회사의 계약관리 담당들이 더 많이 내라고 협상까지 벌인다. 언제부터인가 있어온 이 관행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선주는 계약서상에 명기된 계약금액 이외에 어떤 돈도 낼 의무가 없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인 강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곡된 노사문화의 뒤틀린 부산물이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민노총 울산지부는 울산시가 기업사랑운동을 벌였다고 울산시를 상대로 하룻동안 총파업을 벌렸다. 파업의 자제를 촉구하는 시민단체, 상공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회식을 중단하고 휴가용품 구매를 보류하는 등 상인들 괴롭히기 운동을 벌였다. 지상에 발을 봍이지 못하고 지상의 최소한 예의도 배운적이 없는 어느 별나라에 사는 사람들 같다. 경북포항지역 전문 건설 노조원의 경찰과의 대치는 계속되면서 그들이 몸담고 있었던 회사들은 문을 닫았고 그들의 조합원들은 떠났다. 지역 주민들은 그들이 포항으로부터 떠나 주기를 요구했고 그들의 설 자리는 사라졌다.

노조 지도자들의 얼굴 내밀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방폐장 건설 반대에, 환경관계시위에 그리고 심지어는 자유무역협정반대에까지 앞줄에 앉는다. 노조 지도자가 왜 자유 무역 협정에, 방폐장 건설 반대의 앞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납득할만한 설명을 듣고 싶다. 거기는 결코 그들이 앉을 자리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데서 비롯된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는 버려두고 끊임 없이 남의 자리만 기웃거리기 때문이다. 다른 것 다 두고 자리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찾을 때 우리 사회는 안정되고 옛 번영을 되 찾으리라 확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