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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백한 손
  Author : 황성혁     Date : 04-10-14 10:11     Hit : 12968    
 
 
대한조선학회지 제41권 2호에 실린 글입니다.
 

창백한 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때 마다, 주저하지 않고 마산의 3월15일과 서울의 4월19일 일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내가 그날의 성공에 티끌만큼의 도움도 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날들에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온 등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하게 했던 그날들은 고비 때마다 내게 용기를 주었고, 그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곤 했던 것이다. 그 역사적인 날들은 오히려 나 같은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날들은, 그날을 밑천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분들보다 나같이 그저 그날을 생각만해도 가슴이 뛰고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오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60년 3월15일 나는 마산에 있었다. 사월의 대학 개학을 앞두고 상경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내게는 투표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투표소를 찾아갔다. 투표용지를 달라는 요구에 담당자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가 서울에 가 있었기 때문에 내 투표용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적극적으로 싸우기 보다 냉소적이었다. 남의 말하듯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러면 내 투표용지는 당신이 대신 찍어주는 거지요.” 대답은 없었고 서술이 시퍼런 눈총만 받았을 뿐이었다. 투표를 마치고 나온 어머니는 말했다. “투표 용지에 도장을 찍을라 카는데 옆 투표장에서 포장위로 손가락 하나가 갑자기 내려 오드마는 이기붕이를 콱 짚는기라. 정신 없이 손가락이 짚은 대로 찍고 나왔제.” 그렇게 모두 무기력했었다. 세상은 바뀔 가능성이 없었고 자유당은 만년 동안 집권을 할 것 같았고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상경하기 까지 며칠 동안이라도 등록금을 벌어 보겠다고 이 집 저 집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날 저녁 고3 한 명과 수학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었다. 주위가 수런거리기 시작하더니 옆집으로 돌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야당으로 출마해서 당선된 뒤 여당인 자유당으로 자리를 옮긴 국회의원 집이라고 했다. 돌이 날아들고 장독들 터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계속 되었다. 간장 독이 터지고 간장이 철철 쏟아져 내리는 소리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불을 싸지르자는 소리도 들렸다. 모두 피했는지 아니면 쥐 죽은 듯 엎드려 있는 것인지 조용하기는 그 집이나 내가 있던 집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불을 싸지르지는 않았다. 장독대들을 대충 부수고 터지고 나자 데모대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부를 접고 불을 끈 채 라디오가 전해주는 뉴스를 틀었다. 상당히 통제를 받는듯한 방송이었지만 라디오를 통해 대충 파악된 사태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불법 부정 선거가 한 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선거 때면 으레 그러려니 했었다. 기분을 상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이불 속에서 활개치듯 불평하고 저주하던 것도 여느 때와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경찰이었다. 그들이 나서서 군중을 해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해서 해가 질 때쯤은 경찰에 쫓긴 사람들이 구마산 쪽 노비산에 집결되고 모여든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서 그들은 다시 거리로 내려왔다. 주먹도 휘두르며 구호도 외쳤다. 경찰이 물을 뿌리고 저지하면 흩어 졌다가 다시 모이곤 했었다. 그때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전기 불이 꺼졌고 마산 시가지가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 갔던 것이다. 시청에서 개표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항상 구설에 오르던 올빼미 개표, 표 바꿔놓기, 뭉텅이 표 넣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구마산 쪽의 군중들은 어두움 속에서 개표가 진행중인 신마산의 시청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경찰은 막아 낼 수가 없었다.  시청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전 시가지에 전기 불이 들어왔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군중이었다. 어두움 속에서 비교적 자유스럽던 그들은 불빛 아래 그들의 얼굴이 들어날 것이 두려웠다. 전기 불을 켜라고 요구하던 군중은 오히려 불을 끄라고 전력회사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전력회사는 일시에 다시 전기를 끊어 버렸다. 흥분한 군중은 난폭해 지기 시작했다. 변절한 국회의원 집으로 경찰서로 전기회사로 관공서로 몰려가게 되었다.

사태가 어느 정도 파악되고 옆집이 조용해지자 나는 그 집을 나왔다. 자고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나섰다. 시내의 움직임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집에서 걱정할 식구들 생각 때문이었다. 라디오에서 사태를 들었을 때 가슴이 끓어 올랐지만 길을 나서자 나는 밝은 큰길을 피하고 작은 뒷길을 골라 부지런히 걷기 시작했다. 한참 걷고 있을 때였다. 두 명의 사나이들이 유령처럼 어두운 그늘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나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목에 걸친듯한 낮고 험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 내놔 봐” 나는 우선 가슴이 덜컥 내려 않았다. 그리고 엉겁결에 두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내 손을 뒤집어 보더니 심드렁하게 “가봐” 하는 것이었다. 그 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은 거의 집에 다 달았을 때였다. 기관원들이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고 손을 보여 달라고 한 의미를, 어두움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던 나의 창백한 손을 보고 그냥 보내주었던 의미를. 그들은 그날 저녁 돌을 던져서 더러워진 손, 상처를 입은 손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창백한 부끄러운 손은 나의 젊은 시절 나를 괴롭히던 첫 번째 자각이었다. 4월19일 서울에서 혁명이 물결치던 날 나는 작심하고 뛰어들었다. 종로로, 광화문으로 휩쓸려 다니며 외치고 주먹 춤을 추었었다. 엄청난 돌이 날아 다녔고 많은 피가 용솟음 쳤고 많은 생명들이 슬어졌다. 그러나 그날도 나의 손은 창백했었다.
그 뒤 나는 학교를 마쳤고 몇 군데 취직을 했었고, 수많은 사람과 사귀고 헤어졌다. 많이 싸웠고 여러 번 화해도 했었다. 나의 손에는 가끔 때도 묻고 흙에 더럽혀 지기도 했고 상처도 받았었다. 때로는 더럽혀 져야 할 손이 깨끗했었고 깨끗해야 할 손이 더럽혀 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삼월과 사월의 자각은 그때마다 나의 손을 다시 들여다 보게 했었다. 진실로 흙을 묻힐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진실로 창백함을 지켜 낼 수 있겠는가, 나는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들여다 보며 살 것이다.